[충격] 김승규 축출로 살아남은 박선원이 노무현 남북정상회담 기획 - 통일·외교·국방 모두 따돌려: 위키리크스 한국전문
일심회 간첩단 사건과 박선원 비서관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을 기획한 비선조직의 핵심 인물이 일심회 간첩단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던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을 통해 이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2].
박선원 비서관의 배경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안보전략비서관은 일심회 간첩단 사건 핵심인물의 문건에서 수차례 등장한 인물입니다. 이 사건을 수사하던 김승규 국정원장이 2006년 10월 25일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사퇴를 요구받고 27일 사퇴한 후, 수사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아 소환을 면했던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박선원은 노무현 정부 마지막까지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2].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비밀스러운 추진 과정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2007년 9월 5일 미 국무부에 타전한 '남북정상회담 어떻게 가능했나' 제목의 비밀전문에서 충격적인 내용이 드러났습니다[2].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증언
청와대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 남북정상회담은 노무현 정부가 수년간 추진해 왔지만 2개월 전까지는 여의치 않았습니다.
- 이번 정상회담 협상은 국가정보원과 국가안보회의 관계자들이 담당했습니다.
- 외교, 통일, 국방장관(남북관계 주무장관)도 8월 8일 발표 당일까지 이를 몰랐습니다[2].
박선원 비서관의 증언
버시바우 대사는 9월 4일 밤 조셉 윤 정무담당이 박선원 청와대 통일안보전략비서관과 나눈 대화 내용을 전했습니다:
- 노무현 정부는 수년간 정상회담을 추진했습니다.
- 4년 전 박선원, 이종석, 서훈 등 3명의 소그룹이 결성되었습니다.
- 2005년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김정일을 만나 2000년 정상회담 때 약속했던 답방을 요구했지만 반응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 2006년 송민순이 청와대 안보실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북한 비핵화 문제 등에 전념하느라 남북정상회담 문제는 뒤로 밀렸습니다[2].
비선조직의 재가동
박비서관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 송민순 실장이 2006년 12월 외교부장관으로 영전한 후, 백종천 안보실장이 부임했습니다.
- 2007년 5월 노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백종천 실장, 박선원 비서관, 김만복 국정원장, 서훈 등 4명의 비선조직(secretive enabling group)을 다시 가동시켰습니다.
-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재추진했으면 한다는 뜻을 확인하고, 노 대통령의 지침을 받아 이를 추진했습니다[2].
정상회담 추진 과정의 세부사항
시기 조정
- 6자회담이 어느 정도 진전을 보이기 전에는 정상회담이 불가능했습니다.
- 2007년 7월 방코델타아시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2].
공식 접근
- 김만복 국정원장이 김양건에게 편지를 보내는 식으로 공식 접근했습니다.
- 백종천 실장과 김만복 국정원장이 아프간 샘물교회 인질사태에 매달리느라 합의가 다소 지연되었습니다.
- 처음 남한은 7월 정상회담을 제의했으나 북한은 너무 이르다는 반응이었습니다.
- 8월 6일 북한이 8월 말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습니다[2].
실제 정상회담 일정
실제 남북정상회담은 당초 합의보다 한 달 정도 연기되어 10월 2일부터 4일까지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김만복 국정원장은 8월 2-3일, 8월 4-5일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해 정상회담 일정을 협의했습니다[2].
충격적인 사실들
주무장관들의 배제
박선원 비서관은 한국 정부의 모든 고위 관료, 심지어 송민순 외교장관, 이재정 통일장관, 김장수 국방장관까지 8월 8일 공식 발표 전까지 남북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몰랐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주무장관들까지 철저히 배제한 채 비선조직(핵심소그룹)이 정상회담을 추진했음을 보여줍니다[2].
정상회담 의제
박선원은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정상회담의 의제가 될 것이라고 미국 측에 설명했습니다:
- 비핵화 문제
- NLL(북방한계선) 문제
- 군사신뢰구축 문제[2]
김정일의 정상회담 수락 요인
박선원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김정일의 정상회담 수락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 북한이 방코델타아시아 계좌동결로 인해 미국과 최소한의 관계개선이라도 없으면 생존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
- 김정일의 건강이 좋지 않은 점[2]
의혹과 논란
간첩단 연루 의혹자의 정상회담 기획 참여
이 전문을 통해 간첩단 사건 연루 의심자가 노 대통령의 비선조직으로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만약 일심회 간첩단 수사가 철저히 이뤄졌다면, 간첩단 연루 의혹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 남북정상회담 비선조직으로 활동하지 못했을 것입니다[2].
김승규 국정원장의 축출
김승규 전 국정원장은 일심회 간첩단 사건을 수사하며 핵심인물의 문건에서 자주 등장한 박선원 청와대 비서관으로 수사를 확대하려다 2006년 10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사퇴를 요청받고 이틀 뒤 사표를 내게 됩니다. 결국 김 원장이 축출됨으로써 일심회 간첩단의 수사확대는 무산되고, 박 비서관은 청와대에 자리를 보전하며 비선조직으로 발탁돼 마침내 남북정상회담까지 기획했던 것입니다[2].
박선원 전 비서관의 천안함 사건 관련 발언
박선원 전 비서관은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서도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했었습니다[2].
미국과의 소통 문제
이 전문의 보고일자는 9월 5일입니다. 2007년 8월 8일 남북정상회담 발표 직후 이 사실을 백악관은 언제 통보받았느냐는 논란이 일었고, 백악관은 이같은 질문에 대해 '한국 정부와 협의해 왔다'며 사전 통보됐음을 강조했지만 구체적 내용의 통보 시기는 밝히지 않았었습니다. 이 전문을 보면 사전 협의와 통보가 있기는 했겠지만 자세한 내용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2].
결론
이 위키리크스 외교전문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추진 과정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들을 드러냅니다. 일심회 간첩단 사건과 연루된 의혹을 받은 인물이 비선조직의 일원으로 정상회담을 기획했다는 점, 주무 부처 장관들을 배제한 채 소수의 인원이 비밀리에 정상회담을 추진했다는 점,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 등이 주목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과 국정 운영 방식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특히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을 비선 조직을 통해 추진했다는 점은 민주주의 원칙과 투명성 측면에서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심회 간첩단 사건 수사가 중단된 배경과 그 이후 연루 의혹을 받은 인물이 오히려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조사와 해명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대북정책, 국가 안보, 그리고 정부 운영의 투명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요구합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립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