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가 가진 성경, 특히 킹 제임스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종종 개인적인 권위에 따라 따를 부분을 선택하고 따르지 않을 부분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합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바르게 나누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제시하신 방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따르는 것입니다.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는 것의 핵심은 성경의 특정 구절, 장 또는 책이 누구에게 의도된 것인지를 기준으로 성경을 나누는 것입니다. 일단 적절한 대상이 결정되면, 해당 구절의 올바른 적용이 가능해집니다.
바르게 나누는 방법: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
성경의 어떤 구절이나 책이든,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인 질문에 답함으로써 바르게 나눌 수 있습니다:
- 누가 말하고 있는가?
- 누가 의도된 대상인가?
- 시간적 배경 또는 상황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는 것은 해당 구절이 이스라엘에게 쓰여졌는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쓰여졌는지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분리가 가르침이나 상황에 존재하는가? 만약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간 벽"**이 존재한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해당 성경 구절은 우리, 즉 그리스도의 몸에게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왜 바르게 나누는 것이 중요한가?
만약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게 쓰여진 성경 구절을 모세 율법 아래 있는 우리, 즉 그리스도의 몸에게 적용하게 됩니다. 이는 오류, 잘못된 교리, 그리고 혼란을 야기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파들이 수백 개 존재하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이 바로 이러한 혼합과 혼란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율법 아래서 쓰여진 성경을 가져와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강제로 적용하며, 그 결과 성경 진리로 가장한 그릇된 인간 전통과 노골적인 거짓 교리, 거짓 복음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들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바르게 나누는 것은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적절한 이해와 적용에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 없이는 거짓말과 반쪽 진리, 속임수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항상 배우지만 결코 진리에 대한 이해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과거, 지금, 그리고 다가올 시대
에베소서 2장에서 바울은 진리의 말씀을 세 가지 일반적인 시간 기간으로 나누어 제시합니다:
- 과거 (Time Past)
- 그러나 지금 (But Now)
- 다가올 시대 (Ages to Come)
과거 (Time Past): 에베소서 2장 11-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때에 육신으로 이방인이었던 너희가 손으로 육신에 행한 할례를 받아 할례라 불리는 자들에 의해 무할례라 불렸던 것을 기억하라. 그때에는 너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공화국에서 소외되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낯선 자였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느니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에게 말하며, 과거에는 그들과 모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과 약속으로부터 소외되었으며,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과 모세 율법의 수혜자가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이방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고 할례를 받고 모세 율법을 지키지 않는 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개종자'(proselytes)라고 불렸습니다. 과거의 대부분의 이방인들은 소망 없는 이교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But Now): 에베소서 2장 13-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가 한때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평화이시며, 둘을 하나로 만드시고, 우리 사이의 중간 벽을 허무셨느니라. 자신의 육신 안에서 원수됨, 곧 명령들에 담긴 율법을 무효로 하셨으니, 이는 자신 안에서 둘을 한 명의 새 사람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평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요, 십자가로 말미암아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으니, 그로 인해 원수됨을 제거하셨느니라. 오셔서 멀리 떨어진 너희에게 평화를, 가까이 있는 그들에게 평화를 전하셨느니라."
이 '그러나 지금' 시기는 현재의 교회 시대, 즉 은혜의 경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한 명의 새 사람(one new man)의 시기입니다. 이 '그러나 지금' 시기는 교회의 휴거로 끝납니다. 이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유대교로 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으며, 우리는 함께 한 명의 새 사람입니다. 둘 다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해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간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이전의 과거 시기에는 유대인(할례)과 이방인(무할례)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존재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그 구별이 허물어져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중간 벽이 여전히 서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만약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 구절은 그리스도의 몸에게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다가올 시대 (Ages to Come): 에베소서 2장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는 다가올 시대에 그분의 은혜의 지극한 풍성함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그분의 친절함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것이라."
다가올 시대에는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이 하늘과 땅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보여질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 그러나 지금, 다가올 시대는 진리의 말씀을 나누는 간단한 방법입니다.
다른 대상, 다른 사도, 다른 복음
성경은 두 개의 다른 그룹에게 집중합니다: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몸. 또한 두 명의 주요 사도에게 집중합니다: 이스라엘의 사도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
사도행전 시기 동안 두 가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 무할례의 복음 (이방인들에게 해당)은 사도 바울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 나오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묻히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믿음입니다.
- 할례의 복음 (이스라엘에게 해당)은 사도 베드로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16장과 마태복음 28장에 나오는 복음으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고 침례를 받는 것을 요구합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은 "믿고 침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두 가지 복음이 있었을까요? 이방인들은 메시아를 약속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믿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나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구원자가 필요했습니다. 은혜의 복음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할례받은 자들, 즉 유대인들의 사도였다면, 그들의 글의 의도된 대상은 누구였을까요? 당연히 유대인들입니다. 반면에 바울은 이방인들의 사도였습니다. 그의 글의 의도된 대상은 주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자료는 바울의 서신서(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를 그리스도의 몸, 즉 주로 이방인들에게 쓰여진 것으로 구분합니다. 반면에 히브리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서신서들은 이스라엘에게 쓰여진 것으로 봅니다. 이 책들은 칠년 대환난 동안 그들을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시기에 모세 율법이 다시 작동합니다.
히브리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누구에게 쓰여졌나?
이 책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에게 쓰여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자료는 여러 이유를 제시합니다.
히브리서:
- 책의 제목 자체가 의도된 대상이 히브리인, 즉 유대인임을 확인해 줍니다. 일부에서는 "히브리 기독교인"에게 쓰여졌다고 주장하지만, 자료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으므로 "히브리 기독교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릇된 교회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 히브리서 1장 1-2절은 하나님께서 "지난 때에"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이 마지막 날들"에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마지막 날들"은 이스라엘의 예언 프로그램과 관련 있으며,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지막 날들"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사건들이 "곧 일어날" 것임을 시사하며 그들이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완전히 거부한 사도행전 7장 이후 은혜의 경륜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대조됩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은 독자를 바울의 글의 미스터리 프로그램에서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 프로그램으로 되돌립니다. 미스터리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에게 해당하고, 예언은 이스라엘에게 해당합니다.
- 히브리서 2장 3-4절은 "우리가 어찌 그처럼 큰 구원을 소홀히 하면 피할 수 있겠는가? 이 구원은 주께서 처음 말씀하시기 시작하여 들은 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확증되었고, 하나님께서도 표적과 이적과 다양한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자신의 뜻을 따라 증언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원은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먼저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으며, 예수님의 사역은 많은 표적과 이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복음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 복음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에게 "내가 그인 줄 믿지 않으면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의미합니다.
- 히브리서 3장 6, 14절은 광야에서 그들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의 확신과 기쁨을 끝까지 굳건히 붙들라"고 경고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기 위해 칠년 대환난의 "끝까지" 소망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믿을 때 이미 구원의 확신을 가집니다.
- 히브리서 10장 26-27절은 의도적으로 죄를 지으면 더 이상 죄 사함을 위한 제사가 남지 않고, "두려운 어떤 심판과 진노의 불타는 것을 무서운 기대로 기다리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환난기의 유대인들이 짐승의 표를 받음으로써 죄를 짓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자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으며, 심판과 진노를 기다리게 됩니다.
- 히브리서 12장 16-17절의 에서(Esau) 이야기는 환난기의 유대인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에서가 한 그릇의 음식을 위해 장자권을 팔았듯이, 환난기의 유대인이 음식을 사기 위해 짐승의 표를 받아 그의 유업을 팔면 회개할 곳이 없으며 거부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 야고보서 1장 1절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로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몸에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은 "흩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 야고보는 또한 행위, 인내, 견인에 대해 씁니다. 이것들은 칠년 대환난 동안 유대인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특성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모세 율법 아래 있으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행위 기반의 승인 시스템입니다.
- 야고보서 1장 22, 25절은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 자가 되어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완전한 자유의 율법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계속 지키는 자는..."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을 행하는 것에 대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고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전후서:
-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서 베드로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지켜서..."라고 말하며 이방인들을 특별히 언급합니다. 베드로는 왜 이방인들을 구분할까요? 그는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방인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을까요?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자신들은 할례받은 자들에게 가고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기로 바울과 합의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자신의 합의대로 유대인들에게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 베드로전서 2장 12절은 또한 "그들이 너희를 악행자라고 비방하는 자일지라도, 너희의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선행은 환난기 동안 중요하며, 행위 기반의 수용 프로그램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 베드로전서 2장 12절 끝에 나오는 **"방문의 날"**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휴거나 그리스도의 몸의 휴거가 아닙니다. 자료에 따르면, "방문의 날"은 주님의 날과 같으며, 요한계시록 19장 11절 이하에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심판하고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오십니다. 이 "방문의 날"에 오는 자들은 행복하지 않으며, 파괴와 함께 옵니다. 이 표현은 킹 제임스 성경에 이사야서와 베드로전서 두 번만 나옵니다.
- 베드로전서 4장 17절은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될 때가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에게 정죄를 주는 데 사용되곤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심판은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심판입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집, 즉 이스라엘에게 임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결코 심판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은혜와 평화로 시작합니다. 반면 베드로전서는 "은혜와 평화가 너희에게 배가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화를 온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와 평화가 "배가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평화는 환난기 끝에 배가될 것입니다. 심판과 전쟁은 은혜와 평화의 반대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경륜적 인사말입니다.
- 베드로전서 5장 4절의 "목자장" 교리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목자가 아니며, 우리는 그분의 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며, 우리는 그분의 몸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전서가 그리스도의 몸에게 쓰여지지 않았다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 베드로전서 5장 10절은 "너희가 잠깐 고난을 받은 후에..."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서신 시작 부분(베드로전서 1장 6절)에서 그들에게 "잠시 동안"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서신 끝 부분에서 "잠깐 고난을 받은 후"라고 말하며, 이 서신이 환난기의 고난과 나타날 영광을 둘러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이 서신이 환난기를 통과하는 이스라엘에게 쓰여졌음을 보여줍니다.
- 베드로후서 3장 3-4절의 "비웃는 자들"(scoffers)은 칠년 대환난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휴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비웃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오심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언급하며 세상이 창조 때부터 계속되어 왔다고 말하는데, 이는 휴거가 아니라 환난기 끝의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전후서는 칠년 대환난의 불을 견디는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가르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사도로서 우리, 즉 그리스도의 몸에게 쓰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 요한일서 2장 3-4절에서 요한은 명령들을 지키는 것에 대해 여러 번 씁니다.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면, 우리가 그분을 안다는 것을 이것으로 아노라. 나는 그분을 안다고 말하면서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진리가 그 안에 없느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명령들을 지킴으로써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예수님을 압니다. 명령들을 지키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만이 율법을 받았습니다. 이는 환난기 동안 모세 율법을 지키는 것을 다시 언급하는 것입니다.
- 요한일서 3장 22절은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고 그분의 눈에 기쁘게 하는 일들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의 기도는 명령들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응답됩니다.
- 요한일서 5장 3절과 요한이서 1장 6절도 명령들을 지키는 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행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 요한일서 5장 16절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 언급합니다. 현재 그리스도의 몸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나 칠년 대환난 동안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 즉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 죄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구제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 요한은 또한 그의 서신서들에서 적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바로 이전에 나오는데, 요한계시록은 적그리스도와 환난에 대해 많이 계시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히브리서부터 유다서까지의 책들은 이스라엘에게 쓰여진 것이며, 칠년 대환난을 어떻게 생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구원받아 천년 왕국에 들어갈지에 대해 그들에게 가르칩니다. 이 책들은 현재의 은혜의 경륜 동안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 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문맥을 지키고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십시오.
요한계시록: 이스라엘에게 쓰여졌나, 교회에게 쓰여졌나?
요한계시록이 우리,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게 적용될까요? 자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 책의 문맥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교회의 휴거가 아니라, 칠년 대환난 끝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적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원수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천년 왕국을 세우기 위해 돌아오십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둘러싼 사건들이 "곧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만약 요한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95년경에 요한계시록을 썼다면, 은혜의 경륜, 즉 교회 시대를 알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잠시 제쳐두고 이방인들을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곧 일어날"이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짧은 시간 안에"**를 의미하며, 이는 요한이 예수님의 승천 직후에 요한계시록을 썼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합니다. 사도행전 초반에는 유대인들이 메시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왕국을 세우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의 구원과 함께 시작된 은혜의 경륜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전통적으로 이방인 교회들에게 적용된다고 가르쳐지지만, 자료는 이것이 사실인지 질문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아시아 지역에서 온 유대인들이 오순절 명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고, 침례를 받았으며, 아시아의 자신들의 도시로 돌아가 동료 신자들과 작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이 신자들은 바울이 아직 구원받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아니었습니다. 이 교회들 또는 회중들은 전적으로 유대인들로서, 자신들의 메시아인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다룬 "작은 무리" 교회들입니다. 칠년 대환난 후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환난기의 신자들은 주로 유대인일 것입니다.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그리스도의 몸에게 해당되지 않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리스도의 몸은 정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곱 교회 중 여러 곳은 심판과 정죄를 경고받습니다.
- 교회들은 회개하라고 지시받습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고, 믿고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 각 교회에는 이기는 자에게 약속과 축복이 주어집니다. 이기는 자 개념은 바울의 서신서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는 이미 이기는 자입니다. 이기는 자 개념은 복음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에 나타납니다. 히브리 서신들은 환난기를 위한 것이며 이기는 자를 장려합니다. 환난기의 이기는 자는 짐승의 표를 받으려는 유혹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휴거로 환난 전에 제거되므로 그런 유혹에 절대 노출되지 않습니다. 이기는 자는 전적으로 유대인 개념입니다.
- 예수님께서 사도행전 1장에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의 몸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바울을 임명하셨는데, 왜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을 통해 이방인 교회들에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요한을 통해 일곱 교회에게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환난기 동안의 유대인 신자들의 회중이기 때문입니다.
- 등대는 히브리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유대인 서신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의 글(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은 은혜를 통해 믿음을 가르치며, 행위, 율법, 등대와 관련이 없습니다. 히브리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는 왕국의 복음, 영원한 복음, 믿음과 율법의 행위를 가르치며 등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을 등대와 연결하지 않습니다.
- 에베소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은 그들의 행위, 수고, 인내에 대한 것입니다. 행위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구원받기에 합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게는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에베소의 유대인들은 또한 인내가 있습니다. 그들은 환난 끝에 돌아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오시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즉 그리스도의 몸은 율법의 명령들을 지키는 데 집중하지 않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며, 율법의 명령들을 지키는 데 힘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율법이나 명령들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 에베소의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은 영생을 가져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게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영생을 얻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은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성문을 통과하여 도시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자들은 그분의 명령들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생을 가질 수 있습니다. 환난기의 유대인들은 명령들을 지켜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는 믿는 순간 영생을 얻습니다.
- 서머나 교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유대인이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고 사탄의 회당인 자들"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없으며 회당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 명의 새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유대인들을 특별히 구분하기 때문에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킬 수 없습니다. 이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나치 협력자처럼 적그리스도 시스템과 협력하여 자신들의 동족 유대인들을 배신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유대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강화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상처받아 서로 배신하고 미워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 버가모 교회에 대한 편지에서 예수님은 양날 선 칼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은혜와 평화가 아닌 심판과 정죄를 나타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5절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칼이 그분께서 민족들을 치시고 철장으로 다스리며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때 사용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칼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스라엘과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날카로운 칼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오용되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3장 10절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므로, 나도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사는 자들을 시험할 유혹의 시간에서 너를 지켜주리라." 예언 학자들은 이것이 교회를 유혹의 시간에서 면제시키는 휴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들은 환난기의 유대인 회중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에게 해당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환난기 후반부에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6절은 "여자는 광야로 도망하였는데,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예비하신 곳이 있어서 그들이 천 이백 육십 일 동안 그를 먹이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남은 자들을 위한 장소를 예비하셨으며, 많은 이들은 이곳이 요르단의 페트라라고 믿습니다. 그곳에서 남은 자들은 짐승의 표 강요 등의 사탄과 적그리스도로부터 3년 반 동안 보호받습니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내는 구절의 올바른 이해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남은 자들의 보호를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휴거가 아닙니다.
-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상태로 묘사됩니다. 그들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아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입에서 토해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환난기 동안 하나님께 쓸모없게 될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부유하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보십니다. 그들은 돈에 의존하며, 주님 대신 번영에 의존합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자신들의 메시아 예수님을 위해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왕국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이런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그리스도의 몸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다가오는 환난기 동안 자신들의 메시아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 신자들의 교회들 또는 회중들에게 적용됩니다. 일곱 편지는 은혜의 경륜, 즉 교회 시대의 일곱 시기나 단계를 나타내지도 않습니다.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가? 현대 교회들의 문제점
자료에 따르면,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이러한 명확하고 분명한 구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기독교계의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현대 교회들의 문제점은 그들이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를 읽기는 하지만, 어떤 부분은 다른 시기의 사람들에게 쓰여졌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 초반부에만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신약성경은 거의 읽지 않습니다. 이것은 해로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약성경 전체를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이스라엘에서 교회로, 예수님의 사역에서 바울의 사역으로 문자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누가 대 무엇이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은 이스라엘에게 오셨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초반부의 사도들은 "그분의 이름"을 믿으라고 전파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다른 어떤 이에게도 구원이 없으니,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하늘 아래 사람들에게 주어진 바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행전 13장 38-39절에서 조금 다른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해 전파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형제들이여, 이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이 여러분에게 선포됨을 알라.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자는 모세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었던 모든 것에서 그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느니라." 바울은 새로운 용어, 즉 의롭게 된다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율법을 지키는 것 없이 이루어집니다. 행위나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죄 사함을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롭고 다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바울의 서신서, 특히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를 등한시하고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 초반부에만 집중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위한 교리에 빠져들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 원하시는 교리를 취하지 않습니다.
흔히 오해되는 교리들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교리들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됩니다:
- 구원: 현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 물 침례나 명령을 지키는 것 또는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자료에 따르면, 이는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지이거나 환난기 동안의 메시지이며, 오늘날 은혜의 경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복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직 은혜로,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묻히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선포한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받았다고 갈라디아서 1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이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부르며, 이는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로마서 16장 25절, 디모데후서 2장 8절, 로마서 2장 16절에서 이 복음을 **"나의 복음"**이라고 세 번 부릅니다. 오늘날 구원은 이 복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 구원 상실: 일부 교회는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자료는 바울의 글에서 영원한 보장 또는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구원받을 때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들은 후에, 또한 믿은 후에, 약속의 그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나니"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거듭나는데, 거듭난 상태를 잃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자료는 다음 경륜(환난기)에서는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 휴거 대 재림: 많은 사람들이 휴거와 예수님의 재림을 혼동합니다. 자료는 이 둘을 예수님의 두 부분으로 된 재림으로 봅니다.
- 휴거: 그리스도의 몸의 휴거는 비밀스러운 나타나심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갑자기 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복된 소망입니다.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지배하기 전에 떠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 이하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 재림: 예수님의 재림은 칠년 대환난 끝에 일어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며, 심판하고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오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 중에 천사들과 함께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때 그분과 함께 오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절은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휴거 때가 아니라 그분께서 재림하여 왕국을 세우실 때입니다. 환난기와 영광은 항상 함께 옵니다.
- 그리스도의 신부: 많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가르칩니다. 자료는 이것이 그릇된 교회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킹 제임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표현 자체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 한다고 말한 것은 그들의 영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비유일 뿐이며, 바울이 누군가를 예수 그리스도께 신부로 약혼시킬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참된 신부이며, 그 결혼은 예수님의 재림 후, 그분께서 천년 왕국과 이스라엘 집과의 새 언약을 시작하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그리스도의 몸)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손님이나 구경꾼일 수 있지만, 신부는 아닙니다.
- 대체 신학 (Replacement Theology): 이 잘못된 교리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끝내셨다고 주장합니다. 자료는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교리이며, 3세기 오리겐에게서 시작되어 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교리화된 로마 교회의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경이 아닌 개인적인 관찰(이스라엘이 흩어지고 성전이 파괴된 것을 보고)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대체 신학은 이스라엘의 신성한 운명을 강탈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님께서 명하신 목적(은혜의 영광스러운 복음 전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는 복음보다 왕국에 더 관심을 가지는데, 왕국은 이스라엘에게 합당한 것이지 교회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
"아래자료 참조"에 근거하여,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생활과 성경 이해에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다른 대상과 다른 시기에 맞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쓰여진 부분(구약성경, 복음서, 사도행전 1-7장, 히브리서-요한계시록)과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에게 쓰여진 부분(바울의 서신서, 로마서-빌레몬서)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은혜의 경륜에서 우리는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받으며, 우리의 교리는 바울의 서신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르게 나누지 못하면 혼란과 오류, 잘못된 교리로 이어져, 많은 교회들이 성경 진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전통을 따르게 됩니다.
자료는 독자들에게 스스로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인간의 전통이나 교파의 가르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를 분별할 것을 강력히 권고합니다. 바르게 나누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제네시스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시간표를 차트 형식으로 보는 것이 유익하며, 자료 제공자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이러한 차트를 제공한다고 언급합니다.
이 글이 제공된 자료의 내용을 바탕으로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문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참고: 이 글은 제공된 "아래자료 참조" 파일에 포함된 유튜브 동영상 스크립트 내용만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글자 수는 약 38,000자에 가깝도록 노력했으나, 원본 자료의 내용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요청된 분량을 정확히 맞추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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